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단 편집) ==== 러시아 ====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고르바초프를 [[소련]]을 개혁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해체시킨 정치인으로 평가한다. 비록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사후에도 청산되지 못했던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개혁하고, 소련 사회를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 바꿔나가려 시도했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을 급격히 추구하면서 소련이 붕괴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그동안 러시아 국민들이 누려온 복지나 사회 체계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던 중장년 세대는 고르바초프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러시아는 초강대국에서 3류 국가로 추락했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렸다. 군대만 해도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 명이었다.[* 이 숫자는 지금의 [[미군]], [[중국군]], [[인도군]]의 병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숫자다.]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 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 물자도 줄어들었는데 그나마도 노후화되고 고장난 게 태반이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 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그 경제구조의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푸틴]]의 잘못도 크다. [[2022년]] 기준, 30년이 지났는데도 [[러시아]]는 [[수호이]], [[미그]], [[에네르기아]], 흐루니체프 등 구 소련 시절의 기술력으로만 연명하는 군대나 항공우주 관련 기업들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대기업도 없이 아직도 [[한국]]과 [[GDP]]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카스퍼스키]], [[가즈프롬]], [[라다]], [[아에로플로트]] 등 몇개 기업은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한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에 비하면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우선 옐친의 소위 '서방으로부터 조언받은 충격요법'을 실시한 후 벌어진 러시아의 참상에 비하면 고르바초프 시기는 그보다는 나았다. 또 고르바초프가 재임했을 땐 이미 브레즈네프 시절에 개입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여기에 '체르노빌 참사'라는 악재까지 겹쳐진 게 일종의 면피 요소는 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2001년 개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아프간에 주둔하다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아프간 전쟁의 조기종전 및 철군을 이끌어 낸 고르바초프의 업적도 재평가받고 있다. 결국 2021년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8월 15일에 항복했고]], 미국의 철군 및 민간인 이송 과정이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철수 작전이란 당연히 자국 민간인부터 대피시키고 나서 군대 철수를 하는 과정이 정석인데, 군대부터 덜컥 철수하는 바람에 철수 시점에 아직도 1,000여 명의 미국인이 아프간에 남아 있는 판이었다. 그나마 아프간을 탈레반이 완전장악하지 못하고 NRF가 결성되어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방 눈치를 안 볼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들이 인질이 되지는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철군 과정이나 소련 철군 이후에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유지 및 지원이라도 잘한 고르바초프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무자헤딘에게 정권이 전복당하긴 했지만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고 아프간에 대한 지원을 끊고 러시아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은 탓이지, 이 셋 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여전히 지원을 하여 나지불라와 휘하 아프간 정부군 장성 및 각료들은 무자헤딘들과 내전 및 준내전 상태를 유지해가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유지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이라는 국가를 마지막까지 수호하려 노력했고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음에도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좀 더 강화하는 형태, 즉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바꿔서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실제 고르바초프는 정치적으로 보수파의 불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화국들의 자치권을 강화시키는 형태로라도 독립을 저지하고 연방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에 타격을 준 또다른 원인으로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1960년대 중반 이래로 러시아 평균수명이 침체된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의 증가였다. 여기에 보드카 제조로 인하여 막대한 곡물이 들어가자,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세수를 확보하는 한편 평균수명을 증가시키려 했다. 하지만 금주령 정책은 국민들의 평균 수명을 늘릴 수 있었으나 반대로 정치적 인기를 줄어버렸고, 여기에 국제유가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줄어들면서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는 동시에 암시장까지 활성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술을 권장하는 러시아 문화 특성상 사마곤이라 불리는 밀주나 [[향수]] 등 대체품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이 해체되고 자유시장이 도입되면서 보드카 배급 제한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후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 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영미권의 시각으로는 소련 붕괴가 고르바초프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에도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고르바초프 시기 터져나온 민족주의 및 자치권 요구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형식상으로는 구성국 간 평등한 연합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제 독재국가였던 소련 체제 내부의 모순과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 뒤에는 강압통치라는 부정적인 선례를 만든 [[레닌]]과 [[스탈린]], 스탈린 사후에도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던 전임 지도자들의 책임 역시 크지만, 이 모든 문제점이 터져나온 것이 고르바초프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이 무너진 것은 고르바초프의 책임이 아니며, 고르바초프는 그냥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원조라고 할 수 있고 영미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도 이런 시각을 가진 논객이나 언론들이 많다. 이런 입장을 가진 논객이나 학자들은 마찬가지로 [[중국붕괴론|중국도 곧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한걸음 나간 사람들이 아예 무력으로 이런 체제를 무너뜨려야한다고 주장하는 [[네오콘]]이다.] 다만 이것은 소련 자체를 악으로 보는 서구권의 시각이며,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의 성급하고 미숙한 서구화 정책이[* 반푸틴이자 리버럴한 성향인 한국 귀화 러시아인인 [[일리야 벨랴코프]]조차도 고르바초프를 "흐리멍텅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무너뜨렸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이런 정서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좋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